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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지성 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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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메지성 연표
히메지성 관련(주요 사항) 히메지성 관련(기타)/히메지시의 사건 전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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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력・연호 사건
8세기 하리마 지방 행정관청이 히메지에 설치됨.

하리마 지방 행정관청이 히메지에 설치됨으로써 그 후에도 사람과 물자가 모이는 지역의 중심지로 자리매김되었고, 하시바 히데요시나 이케다 데루마사가 새로운 거성을 세울 때에도 자연스럽게 히메지를 본거지로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1324~28년・쇼추ㆍ가랴쿠 연중 하리마 지역 내의 ‘악당’ 세력이 확대되어 축성기술도 발달하는 모습을 “미네아이키”가 전한다.

“미네아이키”라는 남북조시대의 사료에는 ‘망루를 쌓아서 돌을 날린다’, 세이로나 각종 방패를 갖추는 등 성에서의 군사 행동에 능한 신흥세력 사람들의 모습이 보입니다.

1333년・겐코 3년 아카마쓰 노리무라(엔신)가 막부 타도 거병에 가담하여 히메야마 산에 성의 위치를 정했다고 한다.
1346년・조와 2년 아카마쓰 사다노리가 처음으로 히메야마 산에 성을 쌓았다고 한다.

부친 아카마쓰 노리무라와 함께 행동하면서 아카마쓰 가문의 하리마 지방 지배를 견고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리마카가미”라는 에도시대의 지리지에 의하면, 산상의 사원을 산기슭으로 내리고, 히메지성의 원점이 되는 거관을 세웠다고 합니다.

1397년・오에이 4년 교토 기타야마테이(금각)의 입주ㆍ상량식이 열림.
1441년・가키쓰 원년 아카마쓰 미쓰스케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를 살해하고 같은 해에 기노야마성에서 패사한다.(하리마 지역은 야마나 가문의 영지가 됨)
1467년・오닌 원년 오닌의 난이 시작된다.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하리마 영지를 회복하고 히메지성을 개축했다고 한다.

1441년 가키쓰의 난으로 하리마에서 아카마쓰 본가가 제거된 후 오닌의 난을 계기로 다시 일어선 당주 마사노리가 히메지로 입성. 쓰루미마루와 가메이마루를 비롯해 오몬 문ㆍ도몬 문ㆍ기쿠이 등 성을 개수했다고 합니다.

1469년・분메이 원년 아카마쓰 마사노리가 오지오성을 세워서 이주함.
1535년・덴몬 4년 ※이 연도가 새겨진 일석오륜탑이 하시바 히데요시의 옛 천수각 석벽 뒤쪽에 사용되었다.
1537년・덴몬 6년 이누야마성 천수각의 하층 부분이 건설됨.(망루 부분은 게이초기에 건설)
1543년・덴몬 12년 포르투갈 선박이 다네가시마 섬에 표착하여 총포가 전래되었다.

포르투갈에서 전래된 총포는 순식간에 일본 국내로 퍼졌고, 전술이나 축성 방식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벽토를 두껍게 한 담과 망루를 둘러싼 평지 성곽이 종래의 산성 대신에 성곽사의 중심에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1561년・에이로쿠 4년 구로다 시게타카ㆍ모토타카 부자가 히메지성을 개수하다.(에이로쿠 신성)
   쇼묘지 절 문서를 통해 ‘히메지 온가마에’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쇼묘지 문서”의 매매증명서에 따르면 히메지무라의 스케다유의 밭이 ‘히메지 온가마에 동문 입구’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온가마에’의 상세한 내용에 대해서는 알 수 없지만, 이후의 히메지성으로 계승되는 성곽 요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1575년・덴쇼 3년 나가시노 전투. 구로다 요시타카가 상경하여 오다 노부나가를 만나다.
1576년・덴쇼 4년 오다 노부나가가 아즈치성을 기공하여 본거지를 옮기다.

오다 노부나가의 아즈치성은 높은 석벽으로 성산의 요소를 확고하게 다지고, 그 중심에 화려한 천수각 건축을 창출하는 등 주위를 압도하는 권위를 과시하면서 이후의 성곽 스타일을 확립했습니다. 현재도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한 사적정비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1577년・덴쇼 5년 주고쿠 경략(모리 가문에 대한 공격)을 위해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에 파견되다.
1580년・덴쇼 8년 미키성(벳쇼 가문)ㆍ아가성(미키 가문)ㆍ조스이 산성(우노 가문)이 낙성하여 하리마가 평정되다.
   히가시하리마ㆍ나카하리마의 성곽 파괴(오지오와 고차쿠 등 9개 성) 명령이 내려지다.

히데요시의 하리마 평정으로 중세를 대표하는 아카마쓰 본가 오지오(오키시오)성 등 국내에서 불필요한 성곽의 파과(파성)가 이루어졌으며, 지역사회의 새로운 지배구조가 형성되면서 권력 상층부의 성곽 관리 및 통제가 실시되었습니다.

   구로다 요시타카가 히메지성을 하시바 히데요시에게 헌상하고 메가의 고산성으로 이주.
1581년・덴쇼 9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히메지성에 3층 천수각을 세우다.
1582년・덴쇼 10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빗추 다카마쓰성을 강물로 공격하다. 혼노지의 변. 히데요시가 아케치 미쓰히데를 치다.
1583년・덴쇼 11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오사카성을 기공하고, 하시바 히데나가가 히메지성주가 되다.

이시야마 혼간지 절터를 대규모로 개수하여 도요토미 가문의 거성으로서 축성공사가 이루어져, 선착장을 중심으로 성하도시의 계획적인 건설이 추진되었습니다. 전란에서 천하통일의 세상으로 시대가 바뀜에 따라 그에 대응한 성곽의 형태가 요구되고 있었습니다.

1585년・덴쇼 13년 하시바 히데요시가 종1위 자리에 올라 간파쿠가 된다.(이듬해에 도요토미 성을 받다)
   아카마쓰 노리후사가 아와 지방으로 영지를 옮긴다.(중세에 하리마 지역을 지배한 가문을 다른 지방으로 옮김)
1588년・덴쇼 16년 전국에 무기 수거 명령이 내려지다.
1590년・덴쇼 1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간토의 호조 가문을 몰락시키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에도성에 들어가다.
1591년・덴쇼 19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 출병을 명하다.(게이초 3년까지)
1598년・게이초 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아카마쓰 노리후사 사망.
1600년・게이초 5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케다 데루마사에게 하리마 영지 52만석 남짓이 하사되다.
1601년・게이초 6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히메지성 축성공사를 시작하다.

세키가하라 전투 후 하리마 지방 52만석의 영주가 되어 히메지성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구축한 이케다 데루마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사위이기도 했지만 도요토미의 은혜를 입은 도자마 다이묘의 한 사람이기도 했기 때문에,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배려한 인선이었다고 여겨집니다.

1603년・게이초 8년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정이대장군이 되다. 센히메가 도요토미 히데요리에게 시집가다.
   이케다 데루마사의 차남 다다쓰구에게 비젠 영지 28만석 남짓이 하사되다.
1606년・게이초 11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에도성 개축공사에 종사하다.
1607년・게이초 12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슨푸성 개축공사에 종사하다.
1608년・게이초 13년 이케다 데루마사가 단바 사사야마성 축성공사에 종사하다.
1609년・게이초 14년 히메지성 대천수각이 완성되다.
1610년・게이초 15년 이케다 데루마사의 삼남 다다카쓰에게 아와지 영지 6만석 남짓이 하사되다.
   이케다 데루마사가 나고야성 축성공사에 종사하다.
1611년・게이초 16년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상경하여 니조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만나다.(데루마사는 히데요리와 동행)
1613년・게이초 18년 이케다 데루마사 사망. 장남 도시타카가 히메지성주로서 42만석을 계승.
1614년・게이초 19년 오사카 겨울 전투.

보강이 이루어진 오사카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성곽이었습니다. 겨울 전투에서는 군사시설로서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한 성곽 공방전이 되었으나, 휴전 후 방어선이 파괴된 오사카성에서의 농성은 없었습니다.

1615년・겐나 원년 오사카 여름 전투. 일국일성 명령이 내려지다.

오사카성 도요토미 가문을 멸망시키고 도쿠가와의 패권이 확립된 단계에서 다이묘가 영내에서 소유하는 성곽을 거성 하나로 제한하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이때부터 에도막부가 관리ㆍ통제하는 대상으로서의 근세성곽이 정착되어 나갑니다.

   막부가 무가제법도를 정하다.(새로운 성 건설의 금지와 성곽 수리에 관한 신고제 실시)
1616년・겐나 2년 센히메가 구와나성주 혼다 다다마사의 아들 다다토키에게 개가하다.

도쿠가와 히데타다의 딸(어머니는 오고)로서 도요토미 히데요리와 결혼했지만, 오사카 전투에서 히데요리와 사별하고, 재혼한 혼다 다다토키와의 새로운 생활이 히메지성에서 시작합니다. 이때 부부를 위해 니시노마루가 정비되었습니다.

1617년・겐나 3년 혼다 다다마사가 히메지성주가 되다. 센히메도 다다토키와 함께 히메지성으로 들어오다.
1618년・겐나 4년 혼다 다다마사가 센바 강을 개수하여 뱃길을 열다. 센바 강변에 자이모쿠초를 모으다.
1619년・겐나 5년 막부가 히로시마성 무단 수리를 이유로 후쿠시마 마사노리를 개역하다.
   마쓰모토성에서 옮겨 온 오가사와라 다다자네에 의해 아카시성 축성공사가 시작되다.
1623년・겐나 9년 센히메가 오토코야마 산에 천만대자재천신의 목상을 모시다.(니시노마루에서 요배)
1626년・간에이 3년 혼다 다다마사가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1층 가로대 밑에 빗대공을 추가 보강하다.
   혼다 다다토키가 사망하고 센히메가 에도로 돌아가다.
1637년・간에이 14년 시마바라의 난.

하라성에서 농성하는 봉기 세력을 간신히 제압한 에도막부는 고성이 전투에 이용되는 것을 우려하여 더 강력한 ‘파성(성곽 파괴)’을 추진했습니다. 시마바라의 난 이후에는 본격적인 군사 충돌은 없어졌고, 실전 체험도 점점 더 풍화되어 갑니다.

1644년・쇼호 원년 막부가 모든 지방에 명령하여 영지 지도 및 성 도면을 작성ㆍ제출하도록 하다.

에도막부는 영지 지도 작성과 함께 전국의 성 도면을 제출하도록 각 다이묘에게 요구했습니다. 오늘날까지 현존하는 쇼호 성 도면이 바로 이것이며, 구루와나 해자의 규모 및 천수각ㆍ망루의 도면 등 전국 공통의 사양으로 성곽의 주요 군사정보 장악을 도모했습니다.

1648년・게이안 원년 아코에 들어간 아사노 나가나오가 군사학이론을 바탕으로 성의 개수공사를 시작하다.
1652년・조오 원년 사카키바라 다다쓰구가 히메지성에 있는 소금을 점검하다. 소자(합사 신사)에 석조 정문(현존)을 헌상하다.
소자 참배길의 석조 정문【소자 참배길의 석조 정문】
1656년・메이레키 2년 사카키바라 다다쓰구가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동서 대기둥 뿌리 부분의 수리를 실시하다.

히메지성 천수각은 2개의 대기둥이 중앙을 관통하여 중층 건축의 내부구조를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축성 후 50년이 지나자 대기둥의 뿌리 부분을 보강하는 대규모 수리가 이루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동쪽 대기둥(뿌리 부분)/당 박물관  성 전시실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내관 모형/당 박물관  성 전시실

【왼쪽: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동쪽 대기둥(뿌리 부분) 당 박물관 성 전시실】
【오른쪽: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내관 모형 당 박물관 성 전시실】

1657년・메이레키 3년 메이레키 대화재로 에도성 천수각이 소실되다.(이후 재건되지 않음)

일본 최대의 천수각으로서 도쿠가와 쇼군의 권위를 과시. 그 이후 에도성에 천수각이 없는 시대가 이어지지만, 성곽과 천수각의 관계가 재고되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江戸城天守模型/当館:城展示室【에도성 천수각 모형/당 박물관: 성 전시실】
1659년・만지 2년 히메지성 아래/혼마치 다지마야 구자에몬의 전직 하급관리 세이주로가 칼부림 사건을 일으키다.(오나쓰ㆍ세이주로)
1687년・조쿄 4년 혼다 다다쿠니가 히메지성 대천수각에 지주를 추가하고 지붕 수리를 실시하다.
1701년・겐로쿠 14년 아코의 아사노 가문이 개역되다. 혼다 다다쿠니가 가부토야마 신사를 건립하고 신사부지를 봉납하다.
1741년・간포 원년 사카키바라 마사미네가 에도 요시와라의 다카오다유를 낙적시켜 처분을 받다.
1743년・간포 3년 마쓰다이라 아키노리가 히메지성 대천수각에 경사지주 및 지주를 넣다.(천수각의 기울어짐이 멈추었다)
1749년・간엔 2년 사카이 다다즈미가 히메지성주가 되다. 성하도시의 수해에 대해 가신 가와이 사다쓰네가 신속히 대응.

이때 재난을 피해 온 사람들을 히메지성 안으로 피난시켰다는 일화가 남아 있습니다. 또한 익사자를 기리는 성불염원비석(현존)이 이치카와 강 좌안의 산 옆에 세워졌습니다.

간엔 2년 홍수로 익사한 사람들의 성불을 기원하는 비석 동 비석/왼쪽 측면: 피해자 수

【왼쪽: 간엔 2년 홍수로 익사한 사람들의 성불을 기원하는 비석】
【오른쪽: 동 비석/왼쪽 측면: 피해자 수】

   소자 문 옆에 번교 ‘고코도’를 개교하다. 게이후쿠지 절을 현재위치로 옮기다.
1762년・호레키 12년 히메지성 아래의 하시모토 신마치ㆍ고쇼마치의 연공을 개정하여 토지세를 징수하다.
1773년・안에이 2년 사카이 다다자네가 소토보리 해자의 모퉁이에 말뚝을 박고 추락방지 난간을 만들게 하다.
1799년・간세이 11년 사카이 다다미치가 사카이 가문의 히메지 입성 50주년 축하행사를 히메지성에서 실시.
1809년・분카 6년 사카이 다다미치가 의창법 건의에 따라 ‘고네이소(固寧倉)’(비상식량 비축창고)를 영내에 설치.

히메지 영내에 기근 대책용으로 설치된 식량비축시설. 창고의 이름은 중국의 “서경”에 나오는 ‘民惟邦本本固邦寧(백성이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편안하다)’에서 따온 것입니다.

노자토의 고네이소 창고【노자토의 고네이소 창고】
1816년・분카 13년 번교 ‘고코도’를 오테 게바 앞으로 옮기고 규모를 확대.
1820년・분세이 3년 히메지번 경영에 따라 도잔야키 도자기 가마를 오토코야마 산 산기슭으로 옮기고 도기소를 열다.
1822년・분세이 5년 무쓰 지방 남부산 말을 히메지성 안의 세가쿠시에 방목하다.(유사시의 물자운반에 대비)

우치보리 해자를 사이에 두고 히메지성이 입지한 히메야마 산과 사기야마 산의 북쪽 산록에 길게 뻗어 있는 구루와. 군세를 숨기는 예비 공간이지만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습니다.

히메지성의 세가쿠시【히메지성의 세가쿠시】
1846년・고카 3년 사카이 다다미치가 시카마 축항을 기공하다.
1849년・가에이 2년 막부가 마쓰마에번(에조치)과 후쿠에번(고토 열도)에 새 성 축조를 허가함.
1850년・가에이 3년 히메지번이 이에시마 및 무로쓰에 포대를 구축하다.
1853년・가에이 6년 페리(미국)가 흑선 4척을 이끌고 우라가에 내항하다.
1857년・안세이 4년 하코다테에 고료카쿠 건설공사가 시작되다.
1865년・게이오 원년 사카이 다다시게가 막부의 대로에 취임.
1868년・메이지 원년 도바ㆍ후시미 전투. 그 후 오카야마 번병이 히메지에 주둔하여 대치. 1월 16일에 히메지성 문을 열다.
1871년・메이지 4년 폐번치현. 하리마 지방 16개 군이 모여 히메지현(시카마현으로 개칭) 성립.
1873년・메이지 6년 전국의 성곽을 육군성 관할의 존성(히메지성을 포함한 58개 성)과 대장성 관할의 폐성으로 나누다.

육군의 관할지로 이용되는 성곽은 성지로서의 존속을 인정받고, 그렇지 않은 것은 ‘폐성’으로 분류되어 불필요해진 성곽 부분의 불하도 이루어졌습니다. 동시에 옛 시설의 유지관리가 어려워 보존은 바랄 수 없었습니다.

1874년・메이지 7년 오사카 진대 보병 제10연대의 히메지 주둔이 결정되어 1개 중대가 파견됨.
1876년・메이지 9년 시카마현청을 옛 본성(산노마루)에서 성밖 야쿠시야마로 옮김.
시카마현청/이후의 히메지병원【시카마현청/이후의 히메지병원】※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시카마현을 폐지하고 효고현에 합병됨.
1877년・메이지 10년 서남 전쟁. 사이고 군대가 구마모토성을 포위해 공격하지만 함락되지 않음.
1878년・메이지 11년 육군대령 나카무라 시게토가 히메지성ㆍ나고야성의 보존을 상신하다.

전국에서 유례가 없는 구조의 성곽으로서 나고야성과 히메지성의 수리 비용을 육군경 야마가타 아리토모에게 상신한 나카무라 대령 덕분에 수리가 이루어지게 되었습니다.

1882년・메이지 15년 히메지성 비젠마루가 화재로 건물 소실.
1889년・메이지 22년 히메지의 시제가 시행.
1894년・메이지 27년 반탄 철도(히메지~데라마에 구간) 개통.
1896년・메이지 29년 육군 제10사단이 히메지에서 창설.(옛 나카보리 해자 안에 군용시설이 집중됨)
육군 제10사단 사령부【육군 제10사단 사령부】※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04년・메이지 37년 러일전쟁이 시작되다.
1908년・메이지 41년 백로성 보존 기성동맹회가 조직되어 히메지성 보존수리를 청원하다.
1910년・메이지 43년 히메지성에 메이지의 수리가 실시되다.(이듬해에 준공)

공사용 잔교는 비계가 설치된 천수각의 동쪽에서 기사이몬 문 앞으로 뻗어나가고 있습니다. 이 본격적인 수리로 인해 히메지성이 황폐해지지 않고 겨우 체면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히메지성의 메이지 수리 【히메지성의 메이지 수리】※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12년・다이쇼 원년 히메지성(혼마루ㆍ니노마루 이내)의 무상대여가 히메지시에 인정되어 히메야마 공원과 함께 공개되다.
1919년・다이쇼 8년 성안의 세가쿠시에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대좌는 현존)이 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도요토미 히데요시 동상】※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25년・다이쇼 14년 보병 제10연대(오카야마로 이동) 터를 보존하기 위해 히메지성 승지보존 기성동맹회를 결성하다.
1928년・쇼와 3년 ‘사적명승천연기념물법’에 따라 히메지성의 6만 여평 땅이 사적으로 지정되다.
   히메지성의 관할이 문부성으로 이관됨.
1931년・쇼와 6년 ‘국보보존법’에 따라 히메지성 천수각 9필이 국보로 지정되다.(같은 해 망루ㆍ문ㆍ담도 추가로 지정)
   오사카성의 천수각(철근 콘크리트제)이 세워지다.
1932년・쇼와 7년 국도2호선 개수를 위해 우즈미몬 문에서 소자몬 문까지의 나카보리 해자를 매립.
매립공사 중인 나카보리 해자【매립공사 중인 나카보리 해자】※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히메지성 내의 공개 범위를 확대.(니시노마루를 포함한 히시노몬 문 이내를 추가)
1934년・쇼와 9년 축성 600년 기념식을 산노마루 광장에서 열고 성축제를 개최.
   호우로 인해 니시노마루 나가쓰보네의 일부가 석벽과 함께 붕괴되어 문부성 직영 수리가 시작됨.
1937년・쇼와 12년 치쿠 키네마 로케이션 중에 실수로 ‘로‘ 문의 일부와 토담, 석벽을 폭파하고 말았다.
   히메지성 내의 소나무에 벌레가 발생해 피해를 입었다.(소나무 묘목의 식수)
1941년・쇼와 16년 시험적으로 위장망을 히메지성 대천수각 5층에 설치하다.(이듬해에는 천수각 전체에 설치)

약 6㎜의 새끼줄을 먹으로 물들여 3㎝ 정도의 망사로 만든 위장망. 방공 목적으로 히메지성의 하얀 벽을 눈에 잘 띄지 않도록 숨겼습니다.

위장망을 씌운 히메지성 천수각【위장망을 씌운 히메지성 천수각】※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43년・쇼와 18년 히메지성 니시노마루의 전체 망루 및 ‘하’와 ‘니’ 두 문의 지붕 이음새 회반죽 부분에 빛바랜 색을 칠하다.
   방공대피호를 히메지성 안에 파다.
1944년・쇼와 19년 히메지성 안에 방화용 저수지를 파다. 나카무라 시게토 대령의 현창비(현존)를 세우다.
1945년・쇼와 20년 7월 3일의 공습으로 히메지 시내는 초토화되었지만 히메지성(히시노몬 문 이내)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폐허가 된 시가지와 피해를 입지 않은 히메지성]【[폐허가 된 시가지와 피해를 입지 않은 히메지성]】※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이재민을 니시노마루에 수용하다.
   전쟁 종결. 히메지성의 위장망을 철거하다.
1947년・쇼와 22년 히메지성 산노마루에 야구장 및 스모경기장을 만들다.
히메지성내/산노마루 야구장【히메지성내/산노마루 야구장】※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49년・쇼와 24년 백로성 수리 기성동맹회가 결성되어 국고보조 청원을 실시.
1950년・쇼와 25년 중단되었던 히메지성 보존공사가 재개되다. 히메야마 공원에 전등 설비.
1951년・쇼와 26년 ‘문화재보호법’에 따라 히메지성의 천수각이 신 ‘국보’로 지정되다.
1955년・쇼와 30년 히메지성과 히메지역을 잇는 오테마에 거리가 완성되다.

건설 중인 오테마에 거리【건설 중인 오테마에 거리】※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1956년・쇼와 31년 히메지성 대천수각 등의 해체수리공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다.

가설 지붕에 덮힌 천수각의 남쪽에서 산노마루 쪽으로 공사용 잔교가 설치되었습니다. 이 수리는 천수각을 전부 해체하고, 지반조사와 콘크리트 기초시공을 한 후 새롭게 재료를 추가하여 다시 쌓아 올리는 대규모 공사였습니다.

히메지성의 해체 수리 공사/쇼와 30년대【히메지성의 해체 수리 공사/쇼와 30년대】※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히메지성터가 특별사적이 되다.
1959년・쇼와 34년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기둥세우기 기념식이 거행되다.
   기소다니의 노송나무와 가사가타야마 산의 노송나무를 새로운 서쪽 대기둥으로 사용하기 위해 반입.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서쪽 대기둥 반입/기소 노송나무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서쪽 대기둥 반입/가사가타 신사 노송나무
※모두 당 박물관 소장(다카하시 히데요시 컬렉션)

【왼쪽: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서쪽 대기둥 반입/기소 노송나무】
【오른쪽: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서쪽 대기둥 반입/가사가타 신사 노송나무】

1960년・쇼와 35년 히메지성 대천수각의 골조 작업을 마치고 거행된 상량제.
1964년・쇼와 39년 히메지성 천수각군 및 주변 건물의 보존수리공사가 끝나다.
1972년・쇼와 47년 산요 신칸센(신오사카~오카야마 구간) 개통.
1976년・쇼와 51년 특별사적 히메지성터 주변에서 매장문화재의 본격발굴이 시작.
1983년・쇼와 58년 히메지성터 안에 효고현립 역사박물관과 히메지 시립미술관이 오픈.
1989년・헤이세이 원년 시제 100주년 기념행사 ‘히메지 백세 시로토피아’가 히메지성터 안에서 개최됨.
1993년・헤이세이 5년 히메지성이 호류지 절과 함께 일본 최초로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됨.

연립식 천수각을 비롯해 다수 현존하는 문(15동)ㆍ담(32동)ㆍ망루(27동)가 국가의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으며, 옛 나카보리 해자의 안쪽 일대가 특별사적으로서 환경이 보전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강인함과 아름다움을 두루 갖춘 일본을 대표하는 성곽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